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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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 김영민책 2022. 11. 16. 09:12
'무릇 천지 간의 사물은 각기 주인이 있소.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터럭 하나라도 취해서는 아니 되오. 오직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 사이의 밝은 달은 귀가 취하면 소리가 되고, 눈이 마주하면 풍경이 되오. 그것들을 취하여도 금함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소. 이것이야말로 조물주의 무진장(고갈되지 않는 창고)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길 바이외다.'라고 소동파 선생은 말한다. 어차피 허무할 거라면 달빛과 벚꽃같이 사라지지 않고, 돈으로 살 수도 없는 낭만을 안주 삼아 친구들과 허무를 노래하고, 가끔씩 삶에서 웃긴 레시피를 노래에 숨겨두며 슬플 땐 언덕을 오르고, 기왕이면 시시포스의 돌 대신 내가 구르며 낙하의 쾌락을 즐기며 살겠소. 아침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만큼 인생의 허무를 생각해 본다 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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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꽃을 든다/ 이문재책 2022. 11. 14. 18:24
이제야 꽃을 든다 -이문재 이름이 없어서 이름을 알 수 없어서 꽃을 들지 못했다 얼굴을 볼 수 없어서 향을 피우지 않았다 누가 당신의 이름을 가렸는지 무엇이 왜 당신의 얼굴을 숨겼는지 누가 애도의 이름으로 애도를 막았는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우리는 안다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면 당신의 당신들을 만나 온통 미래였던 당신의 삶과 꿈을 나눌 수 있었다면 우리 애도의 시간은 깊고 넓고 높았으리라 이제야 꽃 놓을 자리를 찾았으니 우리의 분노는 쉽게 시들지 않아야 한다 이제야 향 하나 피워올릴 시간을 마련했으니 우리의 각오는 쉽게 불타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초혼招魂이 천지사방으로 울려퍼져야 한다 삶이 달라져야 죽음도 달라지거늘 우리가 더불어 함께 지금 여기와 다른 우리로 거듭나는 것, 이것이 진정 애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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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정밀아책 2022. 11. 4. 06:14
예뻐서가 아니다, 잘나서가 아니다, 많은 것을 가져서도 아니다. 다만 너이기 때문에, 네가 너이기 때문에 보고 싶은 것이고, 사랑스러운 것이고, 또 안쓰러운 것이고 끝내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히는 것이다. 이유는 없다, 있다면 오직 한 가지 네가 너라는 사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사랑스런 것이고 가득한 것이다. 꽃이여, 오래 그렇게 있거라. 장례식 블루스(Funeral Blues) -W H 오든 모든 시계를 멈추고, 전화선을 끊어라, 개에게 기름진 뼈다귀를 던져 주어 짖지 못하게 하라, 피아노들을 침묵하게 하고 천을 두른 북을 두드려 관이 들어오게 하라, 조문객들을 들여보내라. 비행기가 슬픈 소리를 내며 하늘을 돌게 하고, ‘그는 죽었다’는 메시지를 하늘에 휘갈기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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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발명 / 이영광책 2022. 10. 28. 09:25
이영광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되겠기에 베르톨트 브레이트 이 시가 생각나는, 숨어 있기 좋은 방이 필요한 지금, 나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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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씌어진 시 / 윤동주책 2022. 10. 26. 05:55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가을이 깊어지면 윤동주의 시가 생각난다 쉬운 것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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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김연수/문학동네책 2022. 10. 18. 05:43
달을 바라볼 때마다 지금 걷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지금 이순간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달까지 걸어갈 수는 없겠지만, 달까지 걸어가는 사람인 양 걸어갈 수는 있습니다. 지금 이순간, 달까지 걸어가는 사람인 양 걷는 사람의 발은 달에 닿아 있습니다. 멈추지 마시길, 계속 걸어가시길, 2022년 가을의 김연수 조금 긴 여행에서 돌아오면 너구리 반마리, 아니 너구리 반개를 끓여서 먹어야 집에 왔구나, 이 향과 이 맛, 일상의 시작을 느꼈다. 시작되지도 않은 미래야, 컵라면 하나 먹을 때까지는 기다려줄 수 있겠지?!